로그인



2024 . 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조회 수 93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내가 가진 자로서 베풀고 가르치고 도움을 주는 것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그들과 하나 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가난할 때, 고통받을 때 비로소 가난한 이들을 이해할 수 있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루미네 수녀 '대구가톨릭 사회복지대상' 수상 소감에서)

부산 동구 범일동 산동네 안창마을에서 어린이 공부방과 그룹홈을 열고 21년간 갈 곳 없는 불우한 아이들의 엄마가 돼 스스로 가난한 삶을 살다 타국으로 떠난 독일인 루미네(72) 수녀.

독일 출신 루미네 수녀
21년간 공부방 운영
가난한 아이들 '엄마'노릇
2평 판잣집서 동고동락
市 '공부방' 다시 열기로

"내가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가난하고 고통받을 때
무엇을 해야할지 알게 됩니다"

안창마을 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하며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다 떠나간 '열두 아이의 엄마', '푸른 눈의 성녀' 루미네 수녀를 잊지 않았다. 루미네 수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루미네 공부방'을 다시 열고 각종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독일 오스나브뤼크 출신의 루미네 수녀는 (재)예수성심전교수녀회 소속으로 한국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2년여 준비기간을 거쳐 1972년부터 천주교 부산교구 언양본당에서 교육과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그러다 수녀는 1979년 독일로 귀국해 10년간 쾰른 시의 엘리사벳 병원 원장으로 평탄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국에서 만났던 가난하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결국 1989년 다시 한국행을 택했고, 부산 동구사회복지관의 간호사로 생활하며 안창마을과 첫 인연을 맺었다.

루미네 수녀는 안창마을에서 혼자 사는 노인, 장애인, 알코올 중독자, 무기력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 등 소외계층을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을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스스로를 낮춰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루미네 수녀가 안창마을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생활하고 있는 모습들. 루미네 수녀는 이곳에서 21년간 살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의 엄마로 함께했다. 부산시 제공

그는 1992년부터 2평짜리 연탄아궁이 방에서 살며 판잣집 1채를 구해 동네 아이들 공부방을 운영했다. 아이들이 늘어나자 판잣집 1채를 더 구해 어린이집을 열었다. 공부방에서는 40여 명의 아이들이 자원봉사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어린이집에선 세 살 유아부터 초등학생까지 12명이 루미네 수녀와 함께 먹고 자며 가족처럼 생활했다.

술주정뱅이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엄마가 가출하면서 남겨진 네 살, 여섯 살 자매마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걸 루미네 수녀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렇게 1명, 2명씩 고아와 다름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살며 키우다 보니 그는 동네에서 '열두 아이의 엄마'로 불렸다.

그의 이름 루미네는 독일어로 '빛'을 뜻한다. 그래서 안창 '백(白)' 씨에 빛 '광(光)', 맑을 '숙(淑)'자를 따서 백광숙으로 이름도 바꿨다. 하지만 2008년 관련 법령 개정으로 무허가 건물에서 공부방과 그룹홈이 불가능해지자 루미네 수녀는 2009년 남태평양 마셜 군도로 선교활동을 떠났다.
루미네 수녀가 안창마을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생활하고 있는 모습들. 루미네 수녀는 이곳에서 21년간 살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의 엄마로 함께했다. 부산시 제공

그러나 그가 안창마을과 인연을 맺은 21년 동안 루미네 공부방과 어린이집을 거쳐간 아이들은 어엿한 성년으로 자라 수녀를 그리워했다. 안창마을 사람들도 루미네 수녀를 잊지 않았다.

안창마을 주민들은 루미네 수녀의 봉사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부산시에 루미네를 기념할 수 있는 공부방을 다시 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시는 이를 받아들여 올해 6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해 안창마을에 번듯한 공부방과 주민 편의시설로 주차장을 마련하기로 하고 부지 매입 등에 들어갔다. 이르면 2015년부터 공부방을 다시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는 공부방과 함께 조각상과 기념물, 활동사진 등으로 공부방 역사와 스토리를 담은 기념공간을 만들고 개소식 때 루미네 수녀를 초청할 계획이다. 공부방을 거쳐 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홈커밍데이 행사 등도 계획 중이다.

강윤경·김형·전대식 기자 kyk93@bus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