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6월 주교회의에서 설립된 인성회는
그해 7월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의 준회원이 되었고,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발전위원회(OHD-FABC)의 회원,
가톨릭 난민 구호위원회(ICMC)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 4월 아시아 인간발전협력체(APHD)의 정회원이 되어,
원조 업무를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 2월부터 사순절 운동을 시작했고,
7월에는 안양과 시흥지역의 수재민 긴급 구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월남 탈출 난민 제3국 정착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78년에는 각 교구 인성회가 설립되고 연수회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1월에는 제4차 아시아 사회 문제 주교 세미나(BISA Ⅳ)에 참석하였습니다.
1979년 2월 '세계 아동의 해'사업을 시작했고,
5월에는 제11회 국제카리타스 로마 총회에 참석하여
정식 회원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11월에는 전국 연수회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2월에는 '가톨릭 결핵사업가 협회'를 결성하고,
10월에는 '가톨릭 아동복지 협의회'를 결성했습니다.
1981년 2월에는 '세계 신심 장애인의 해' 사업을
주교단의 담화와 함께 시작했고,
9월에는 태풍 아그네스로 인한 피해 긴급 구호에 들어갔습니다.
1982년 9월에는 태풍 앨리스의 피해 긴급 구호에 들어갔고,
10월에는 전국 사무국을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 1월에는 아시아 주교단의 한국 현장 체험을 실시했고,
5월에는 제12차 국제카리타스 총회에 참석하였습니다.
1984년 8월에는 빈민 의료 문제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였고,
10월부터 인성회 활성화를 위한 연구 작업에 착수했으며,
12월에는 아프리카 기아민 돕기 모금을 실시하였습니다.
1985년 3월에는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협의회'를 결성하였고,
8월에는 한국 주교단이 현장 체험을 하였습니다.
11월에는 '가톨릭 장애인 복지협의회'를 결성하였고,
'제1차 가톨릭 복지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2월에는 멕시코의 지진과 콜롬비아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의 긴급 구호 원조를 하였습니다.
1986년 1월에는 제7차 아시아 사회 문제 주교 연수회에 참가하였고,
9월에는 '교회 빈민 의료협의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1월에는 제2차 가톨릭 복지 대회를 개최하였고,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 협의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987년 5월에는 제 13차 국제카리타스 로마 총회에 참석하였으며,
이 후 월 회보 '하나 되어'를 창간하여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에는 태풍 셀마 피해의 구호 사업을 하였고,
11월에는 '한국 가톨릭 무의무탁 복지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88년 6월에는 인성회의 영문 소식지 'COMMENT'를 발간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종교 문화에 관한 신학자들이 내한했습니다.
10월에는 아시아 인간 발전 협력체 한국 사업을 평가했고,
12월에는 주교단이 '자선주일'을 설정하였습니다.
1989년 7월에는 남부지역의 집중 호우 피해 긴급 구호를 하였고,
10월 기초 교회 공동체 연수회의 외국 전문가들을 초청하였으며,
'아시아 주교회의 인간발전 위원회 국제 연수회'를 한국에서 개최하였습니다.
11월에는 인성회 총무에 서울대교구 추영호 신부가 취임하였습니다.
1990년 5월에는 아시아 인간 발전 협의체(APHD) 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였고,
국제 카리타스의 에이즈 전문가가 내한하여 연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12월에는 박석희 주교가 인성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1991년 1월에는 제1회 '사회복지주일' 헌금을 실시하였고,
인성회 활성화 및 개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6월에는 걸프전 난민의 구호를 위한 전국 헌금을 실시하였고,
11월에는 주교회의 총회에서 인성회를
사회복지위원회로 개칭하고 개편하는 규약을 인준하여,
12월에는 '가톨릭 사회복지 협의회'가 해산하여
사회복지위원회로 흡수됨으로써
인성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시대가 막을 내립니다.
(한국천주교회연감, 1994, 165-166)